“은퇴 후 이민 가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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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tf.co.kr/read/entertain/1691440.htm 흔히 대중적 이미지는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가수 김장훈(51)은 대체로 호불호가 뚜렷한 색깔로 채색되고 각인돼 있다.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김장훈은 공연장에서 비치는 솔직하고 진솔한 그 모습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왜 그럴까. 아마도 이는 ‘내 방식 내 뜻대로’를 추구해온 그의 삶의 방식 때문인지도 모른다. ‘기부 천사’와 독도 사랑, 그리고 기내 흡연과 욕설 논란 등 김장훈은 그간 숱한 논란과 이슈의 중심에 섰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 찬사와 비난의 변곡점을 교차했다. 잦은 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면서 대중과의 불편한 관계도 깊어졌다. 김장훈과의 인터뷰는 필자도 많은 고민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논란을 야기할 때마다 그의 언행을 아프고 따끔하게 지적한 바 있기 때문이다. 망설임 끝에 만나 보니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 김장훈은 “안그래도 직접 한번 뵙고 싶었다”며 당당히 응수했다. (2017년 5월24일자, [강일홍의 연예가클로즈업] ‘욕설파문’ 김장훈, 흔들리는 ‘기부천사’ 아이콘) 김장훈이 욕설 파문 이후 1년 3개월 만에 무대로 다시 돌아왔다. ‘고운말 콘서트’라는 소극장 100일 공연으로 팬들과 만나고 있다. 긴 자숙의 시간을 거친 그는 “많이 교만했다”며 반성했다. 할말이 많을 그의 속내를 직접 들어보기로 했다. 김장훈과의 스페셜인터뷰는 24일 오후 3시 서울 상암동 사옥에서 2시간동안 진행됐다. -‘김장훈’이란 아티스트에 대한 대중의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지난해 욕설 논란 이후 상념이 깊었을 것 같다. 그간 공백이 자숙의 시간이었다고 이해하면 되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가수로 걸어온 지나간 궤적을 깊이 되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됐다. 맹세코 가식 없이 살았다고 자부하지만 외부에 보여지고 평가되는 건 많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그 차이를 극복하고 바꿀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한다. 우선 물의를 빚고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교만했다.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달라진 모습을 보여드리겠다. 김장훈은 지난해 5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8주기 추모 시민문화제에서 경찰을 언급하며 무대 위에서 욕설을 해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이 부분에 대해 그는 “평소 누구보다 경찰관 소방관들과 호형호제하며 지내는 사이라서 그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만든 게 후회스럽고 더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보이는 대로만 평가하게 돼 있다. 세상과의 잦은 부딪침은 어떤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사실이 왜곡돼 있다면 실제 본 모습이 궁금하다. 이해를 못 하실 수도 있지만 세상에 대한 저의 ‘분노’다. 과거 제가 책을 내면서 ‘분노는 나의 힘’이라고 쓴 적이 있다. 아이들이 굶는다는 사실이 그냥 화가 났고, 독도 소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의 행태가 용서되지 않았으며, 세월호 같은 어처구니 없는 사고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부를 하고, 독도에서 공연을 하고, 팽목항을 스무 번씩이나 오가며 치킨을 배달했다. 한데 그 과정에서도 논란은 만들어졌다. 해야할 말과 하지 말아야할 말, 보여줄 것과 가려야할 것을 크게 개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제 목표와 기준은 바뀌었다. 이전의 제 기준이 분노였다면 이제는 따뜻함이다. -‘따뜻함’이라면 이전에도 봉사활동 재능기부 등을 수없이 많이 해왔다. 연예계 ‘기부 아이콘’이기도 하다. 그 ‘따뜻함’의 의미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이웃을 돕는 일이 무조건 ‘따뜻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한편에서는 또 다른 분노가 자리했다. 잘못된 일을 지적하고 시정할 것을 요구하다 보면 논란을 피할 수 없었다. 아무리 좋은 취지로 말하고 순수한 뜻으로 행동해도 그 분노의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어떤 순수한 나눔도 오롯이 따뜻함으로 다가가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았다. 이제 분노는 버리고 음악과 함께 따뜻한 나눔에만 집중할 생각이다.-불의를 참지 못하고 세상의 잘못된 일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것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김성애 목사)는 뭐든 자율에 맡기셨다. 친구들과 치고받고 싸우는 것을 혼내신 적도, 공부를 강요해본 적도 없다. 다만 한가지 절대 거짓말을 해선 안 된다였다. 또 사내로서 비겁하거나 치사하거나 구차한 짓은 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런 영향을 받고 살다보니 “무릎을 꿇느니 서서 죽겠다”는 체 게바라의 말을 좋아하게 되고, 어느 순간부터 그게 정답이라고 믿게 됐다. 김장훈은 어머니 김성애 목사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다. 갓난 아이 때부터 아버지의 존재를 모르고 살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강직함과 방임형 훈육은 유년시절을 거쳐 청소년기 자유분방한 삶의 토대가 됐다. 그의 어머니는 가수 고 김현식의 어머니인 류진희 여사와 사적으로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공연을 재개하며 관객 앞에 다시 섰다. 과거 잠실주경기장 등 초대형 공연을 많이 했는데 이번엔 작은 소극장 공연이다. 어떤 의미가 담겨있나? 공연 명칭이 ‘고운말 콘서트’다. 지난 8월 말부터 내년 5월 4일까지 예정된 100회 낭만콘서트로 기획했는데 정말 반응이 좋다. 공연 스태프와 오랜 상의 끝에 소극장 공연을 선택하게 됐다. 일체의 방송 출연이나 여타 매스컴 홍보 없이 순수하게 입소문만으로 이끌어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적어도 내년 5월까지는 저의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초심으로 돌아가 진솔한 무대를 꾸며보려고 한다. 필자는 오랜만에 그의 소극장 공연을 직접 보고나서 다시 한번 진면목을 읽었다. 무대에서의 열정 못지 않게 관객과 교감하는 그의 진솔함은 무한공감이었다. 논란의 중심에 설 때마다 따끔한 지적을 하면서 간과했던 부분들에 대해선 개인적으로 미안함도 생겼다. 사적 감정이 깃든 기사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노래를 중단하고 이민을 가려고 했다는 얘기가 있다. 뜬소문인가 아니면 정말 그런 계획을 가진 적이 있나? 5~6년 전쯤이다. 어느 순간 음악이 지겨웠고 관객 앞에 서도 더 이상 설렘이 없었다. 창원인가 어느 지방 공연 때는 할 수만 있다면 관객들에게 티켓값을 되돌려주고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 이후 고통스런 회의를 느끼다 결국 가수 은퇴를 결심하고 한국을 떠나려고 했다. 당시 결행을 못한 건 가족들 때문이었다. 나 혼자 편하자고 어머니와 누나, 조카들을 모두 나몰라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황장애를 시달린 연예계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졌다. 그 때문에 기내흡연 등의 논란에 휩싸인적도 있다. 건강에는 문제가 없나? 저 말고도 이상민 김구라 이경규 씨 등 여러 연예인들이 공황장애에 시달렸다. 공황장애는 겪어보지 않고는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 없을 만큼 힘든 고통이다. 저 역시 정신적 심리적으로 매우 힘들었다. 지금은 공황장애를 극복했다. ‘완치’라는 말을 성급하게 쓰고 싶진 않지만, 이 자리를 빌어 건강을 완전히 회복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김장훈은 2015년 1월 15일 프랑스 드골 공항을 출발해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흡연을 하다가 적발됐다. 1월 19일 대한민국 검찰은 김장훈의 행위에 대해 항공보안법 위반 혐의로 벌금 100만원에 약식기소했다. 당시 그는 심한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고, 극도의 불안심리 상태에서 화장실 흡연을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김장훈의 음악세계는 어떤 것인가? 대중 가수로서 자신만의 특별한 가치관이 있다면 말해달라. 스스로 음악세계를 언급하긴 좀 쑥쓰럽다. 다만 음악적 토대는 김현식이나 유재하이고, 전인권 선배와 교감하고 있다는 외부 평가를 거부하고 싶진 않다. 누구나 추구하는 스타일과 방향이 있겠지만 저한테는 모든 기준이 음악이다. 음악에 대한 저의 만족도는 관객의 반응으로 입증되고, 관객의 호응이 있는한 영원히 무대를 떠날 수 없다. 한때는 완벽한 허무주의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융통성을 가지면 모두가 편해진다는 진리를 터득했다. 김장훈은 대학 시절을 전후한 시기부터 전인권과 김현식과 유재하를 흠모하고 동경하며 음악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경원대학교 영어영문과 시절 1987년 언더그라운드 라이브 클럽에서 가수로 활동했고, 학교의 부당한 처우에 반발해 집회에 앞장서다 불이익을 당하자 스스로 중퇴했다. 김현식과 메신저라는 그룹으로 활동하다 1991년 1집 ‘늘 우리 사이엔’을 통해 정식 데뷔했다. -공연계와 엔터산업을 언급하면서 김장훈이라는 이름 석자가 차지하는 비중을 빼놓을 수 없다. 향후 어떤 모습을 기대할 수 있는지 얘기해줄 수 있나? 대중가수로 활동하면서 많은 걸 깨닫고 배웠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산이 있으면 골이 있게 마련이고, 바닥을 치면 공은 반드시 솟아오르게 돼 있다. 저의 뿌리는 공연이고 관객이다. 선택과 집중, 오직 노래만으로 다시 승부를 걸겠다. 여력이 되면 봉사와 나눔을 곁들이겠다. 마지막이 될 이번 ‘소극장 100일 공연’이 바로 그 시발점이다. 대학로는 연극의 상징이자 소극장 공연의 본산이다. 배우 추상미의 아버지이자 배우겸 제작자였던 故 추송웅은 지금도 연극계의 전설로 남아있다. 배고픈 연극무대에서 오롯이 연극만으로 자립한 배우였기 때문이다. 추송웅은 ‘영원한 빨간 피터’라 불리며 1970년대 소극장 신화를 썼다. ‘빨간 피터의 고백’은 4개월 만에 6만여 관객을 동원할 정도로 화제를 모았고, 추송웅표 모노드라마 ‘우리들의 광대’는 1979년부터 전국을 돌며 500회 넘게 공연해 23만5천여 명의 관객을 불러 모았다. 공연계에서는 김장훈이 맨손으로 소극장 공연 붐을 일으켜 잠실주경기장 5만명 관객 콘서트로 이어간 전설로 꼽는다. -욕설논란 이후 어떻게 지냈나? 고립무원의 심리적인 불편함과 함께 경제적으로도 힘들었을 것같다. 힘들고 괴로웠던 만큼 얻은 것도 많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 좋은 기회였다. 매사 마음가짐의 문제다. 무엇보다 조급함이 사라졌다. 이전에 비해 오히려 많이 여유로워졌고, 어떤 상황에서도 열린마음으로 받아들일 자세가 돼 있다. 돌이켜 보면 그동안의 많은 논란들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제 조급함이 빌미를 줬다고 인정한다. 경제적으로는 사실 힘들었다. 평소에도 움켜쥐고 사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활동을 하지 않으니 당장 생활이 불편했다. 힘들 때 도움을 준 지인들이 있다. 이 자리를 빌어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방송인 박경림은 김장훈의 절친이다. 오빠 동생처럼 편한 관계로 교감하는 사이다. 박경림은 김장훈이 욕설 논란 이후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는 동안 따뜻한 손을 내밀었다. 김장훈은 “경림이가 뭐를 줬다. 이게 뭐냐고 물으니 ‘그냥 쓰라’고 했다. 열어보니 2000만 원이 들어 있었다”면서 “그 마음이 너무 따뜻해서 반드시 그 이상으로 돌려줄 생각”이라고 말했다.-사업을 시작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음악활동과 사업을 병행한다는게 쉽지 않을 거란 생각도 든다. 그렇지 않다. 음악활동을 하면서도 크게 성공할 자신이 있는 사업이다. 의류와 화장품 관련 업종인데 김장훈이란 이름을 앞세우지 않고 사업적 성공을 이루고 싶다. 탄탄히 토대를 일군 뒤에 공개하겠다. 이를 위해 음악활동(공연)은 주말 3일만 하기로 했다. 공연의 질적 수준(무대 음향 조명)을 높이는 대신 티켓값은 내리는 게 제 꿈이다. 완벽한 경제적 자립을 위해 사업을 병행하는 것이고 이는 결국 공연과 나눔의 밑거름이 될 것으로 믿는다.-대중에게 기부문화를 선도한 연예인으로 각인돼 있다. 그동안 무려 150억~200억 가량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왜 논란으로 번졌다고 생각하는가. 나누고 주는 기쁨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 그 행복감을 모두에게 알리고 적극 동참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더 열심히 알리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이런 저런 오해가 생겼다. 주변에서는 ‘왜 나눠주고도 욕을 먹느냐’는 말이 나왔다. 마음은 순수했지만, 방법이나 과정에서 미숙했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저만 괜찮으면 상관없다고 무시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늘 젊은 무대를 선도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저도 나이가 50살을 훌쩍 넘었다. 더이상의 논란은 없을 것이다. 김장훈은 직접 기부 외에도 과학발전을 위해 카이스트 응원 광고를 사비로 게재하기도 했다. 카이스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김장훈을 위한 콘서트 무대장치를 설계(설치) 해주었고 무대 장치에 관한 수업도 실시했다. 독도를 홍보하기 위해 세계 언론사에 ‘일본해’로 표기된 것을 ‘동해’ 표기로 정정요청을 하거나 월스트리트저널에 ‘동해’ 표기가 옳다는 전면 광고를 역시 사비를 털어 후원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10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해 보다 먼저 동해라고 표기해 그 성과를 인정받았다. 그는 또 최초 독도 콘서트를 한 아티스트로도 기억돼 있다. -싸이(박재상)와는 한때 돈독한 우정을 나눈 선후배 가수로 잘 알려져 있다. 공연 등의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지금 어떤 사이인가? 재상(싸이의 본명)이는 영원한 형제다. 만나지는 못 하고 지냈지만 단절된 사이는 아니다. 지금도 연락을 하고 지내는 사이다. 얼마 전에 제가 전화를 했다. 형인 제가 먼저 연락해준 데 대해 고마움과 미안함으로 교감했다. 갈등처럼 비친 것은 음악적으로 가는 길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 부분은 이미 오래 전에 서로 이해하는 부분이라 서운한 감정은 없다.-싸이의 콘서트 스타일은 본래 김장훈이 원조라는 얘기가 있다. 제스처나 춤 등을 싸이가 벤치마킹했다는 얘기는 어디까지 사실인가? 다 지나간 일이다. 그 부분도 공연계에서 만들어낸 말일 뿐, 수긍할 수 없다. 김장훈의 스타일이 있듯 싸이만의 스타일이 있다. 각자 다른 언론 인터뷰를 통해 말이 달라지고 오해가 생긴 것이라고 본다. 깊은 속내를 일일이 털어놓을 수 없다 보니 본심이 왜곡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중 일부는 과장된 부분이 없지 않지만 일일이 설명하고 해명하는게 더 이상한 일이다. 김장훈과 싸이의 불화설은 가요계에 널리 알려진 일이다. 싸이가 김장훈의 ‘공연 아이디어를 모방하고 스태프를 빼갔다’는 주장이었다. 공연기획 문화와 저작권 문제가 대두되기도 했다. 그 무렵 김장훈은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이제 카피 좀 그만했으면”이란 글을 올린 적이 있다. -한때 싸이와 대한민국 공연 문화를 주도해온 입장에서 아쉬움은 없나? 싸이는 그만의 독특한 음악장르로 전 세계를 휩쓸었다. ‘강남스타일’을 통해 한류의 진면목을 보여줬다. 한데 정점을 찍은 것은 방탄소년단이다. 싸이가 지핀 한류의 열기와 인지도는 지금 BTS가 고스란히 받고있다. 과거 재상이가 군복무를 마친 뒤 전국투어로 열기를 달궜다. 당시 제가 기획과 연출을 했는데, 그 입장에서라면 아쉬움은 많다. ‘강남스타일’이 절정일때 월드투어 공연을 했다면 BTS 못지 않았을 거란 얘기다.2000년대 중반 이후 공연계는 김장훈과 싸이가 주도했다. 공연계 매출 1~2위를 다퉜다. 둘은 2009년 9월 함께 공연기획사 ‘공연세상’을 설립한 뒤 ‘김장훈·싸이의 완타치’ 타이틀로 3년간 전국을 장악했다. 둘의 합동공연은 연매출 100억원을 기록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쉰을 넘긴 나이인데 여직 미혼이다. 결혼이나 가정을 일굴 계획은 없나? 사귀거나 염두에 두고 있는 분은 없나? 음악과 공연에 파묻혀 살다보니 결혼을 염두에 둘 틈이 없었다. 솔직히 고백하건데 교제 중인 여성은 없다. 그럴수록 옆구리가 허전하다. 독신주의자가 아닌데 결혼을 왜 마다하겠나. 좋은 분이 생긴다면 파격적으로 우선 동거부터 하고 싶다. 김장훈스럽게 말이다. 인터뷰 도중 필자는 김장훈에게 과거 한 택시 기사한테 직접 들은 일화를 들려줬다. 심야에 택시를 타고가던 김장훈이 사납금도 못채우는 힘든 상황에 어려운 가정사를 듣고 아내에게 삽겹살이라도 사가라며 10만원을 건넸다. 택시 기사는 김장훈을 통해 처음으로 세상의 따뜻한 사랑을 느꼈다고 했다. 다행히 김장훈은 당시 상황을 어렴풋이 기억해냈지만 그냥 빙그레 웃는 것으로 대신했다. 무대 위의 김장훈은 시원함 그 자체다. 폭발적 가창력이 아니라도 객석과의 격의없는 소통만으로 생동감이 넘친다. 따뜻한 가슴, 넓은 가슴을 가졌음에도 그는 늘 논란에 휩싸이곤 했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래서 “그의 스타일과 성격상 잘보이려고 일부러 이미지 관리까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있는 그대로만이라도 비쳤으면 한다”고 말한다. 인터뷰 내내 진솔한 속내를 밝힌 김장훈은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 보니 저절로 힐링이 됐다”고 했다. 과거 자신을 둘러싼 논란과 껄끄러운 질문에도 숨김없이 답변하는 성의를 보였다. 세상은 보이는게 전부는 아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갸우뚱했던 의혹들도 풀렸다. 확실히 달라진 그의 모습을 보며 공연계 ‘원조 블루칩’의 부활이 머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출처 : [http://news.tf.co.kr/read/entertain/1736476.htm, 2018/10/28 07:00:02]